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보기

안창호, 실력 양성론 주장, 학교 설립과 교육에 힘쓰다.(1) 안창호, 실력 양성론 주장, 학교 설립과 교육에 힘쓰다.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 더보기
홍커우 공원 의거, 사건 계획, 과정 홍커우 공원 의거, 사건 계획, 과정 훙커우 공원 의거(虹口公園義擧)는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대한 독립을 위해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침략당한 중국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중국의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하다니, 윤봉길 길이 빛나리'라 칭송하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사건의 계획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윤봉길은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 더보기
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3) 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 생애 후반 (유배 생활)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이번에는 김정희 자신이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그의 유배지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김유근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 더보기
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2) 김정희, 추사체, 개화사상가이며 고증학에 뜻을 두다. ​청나라 왕래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더보기
허균, 몰락과 죽음, 죽음에 대한 의문점(5) 허균, 몰락과 죽음, 죽음에 대한 의문점 몰락과 죽음 (탄핵과 사형) 1617년 12월 12일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26일 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년 1월 좌참찬이 되고 그 역시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 더보기
허균, 사상과 활동 (4) 허균, 사상과 활동 중국 방문과 난설헌 문집 편찬 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명의 문인,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명의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성에 찬탄(讚嘆)하여 특별히 출간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대북이 집권하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연장에 들었다.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參議)가 되고 명에서 국왕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명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그러나 귀국 후 1610년 2월 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더보기
허균, 사상과 활동 (4) 허균, 사상과 활동 중국 방문과 넌설헌 문집 편찬 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명의 문인,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명의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성에 찬탄(讚嘆)하여 특별히 출간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대북이 집권하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연장에 들었다.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參議)가 되고 명에서 국왕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명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그러나 귀국 후 1610년 2월 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더보기
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3) 허균, 정치활동, 탄핵, 파면, 복직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명(明)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파견된 심희수와 형 허봉에 이어 그해 4월 접반사로 명(明)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월 다시 명(明) 사신 접견에 파견된 원접사의 수행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바로 설서(說書)를 지냈고 얼마 뒤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명(明)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검열(檢閱)..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