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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승하하다. 예종,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승하하다. 예종(睿宗, 1450년 1월 14일(음력 1월 1일) ~ 146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8일), 재위 1468년~1469년)은 조선의 제8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황(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조(明照) 또는 평남(平南). 시호는 예종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睿宗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이다. 세종의 차남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치세 1468년 9월부터 이듬해 1469년 12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468년 9월부터 1469년 1월까지 사촌 형이자 손아랫동서인 영의정(領議政) 귀성군 이준(龜城君 李浚)이 섭정하였으며 1469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 승하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예종은 1450년 경오년 정월 정축.. 더보기
남해 차차웅, 국왕이면서 제사장 역할을 하다. 남해 차차웅, 국왕이면서 제사장 역할을 하다.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남해 이사금, 기원전 50년 ~ 24년, 재위 4년 ~ 24년)은 신라의 2대 국왕으로,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적자이다. 이름은 남해(南解), 다른 이름은 민해(愍海)이다. 그의 칭호에 대하여는 국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설이 있다. 왕호 "차차웅"이라는 왕호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김대문을 인용하여,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은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에, 그를 외경해 마침내 존귀한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 고 전하는 바, 이는 신라가 아직 샤머니즘적인 부족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치세 6년(즉위 3년) 음력 1월에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 더보기
박혁거세, 신라 초대 국왕, 세상을 밝히다. 박혁거세, 신라 초대 국왕, 세상을 밝히다. 혁거세 거서간(赫(爀)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 ~ 기원후 4년, 재위: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은 신라의 초대 국왕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赫(爀)居世)란 표기는 한자 음과 뜻을 합친 표기로서, 赫(爀)은 뜻인 "밝"에 가까운 음으로 읽으며, 世는 세상을 뜻하는 고유어 "누리", "뉘"에 가깝게 읽는다. 비슷한 음을 딴 다른 표기로 弗矩內(불구내)가 있으며, 결국 본디 이름은 밝아누리(세상을 밝히다)에 가깝다. 박씨라는 성씨 또한 왕건이 건국한 고려시대 때부.. 더보기
김알지, 전설로 전해지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 전설로 전해지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金閼智, 65년 ~ ?)는 정사가 아닌 전설로 전해지는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이다. 탈해 이사금 때 태어났으며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김씨 최초로 왕에 즉위하였다. 정식 역사에서는 실존 인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생애 65년 탈해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 더보기
호동왕자, 낙랑공주와 혼인,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 낙랑공주와 혼인,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好童, ? ~ 32년 음력 11월)은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이자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이다. 낙랑 정벌에 공을 세웠으나 원비(元妃) 소생의 이복형제 해우(훗날 모본왕)와의 태자 다툼에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아내 낙랑공주와의 이야기가 창작물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출생 대무신왕과 그 차비에게서 태어났다. 생모는 갈사왕의 손녀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왕이 총애하여 호동이라 이름 지었다. 원비도 아들 해우가 있었는데 호동보다는 나이가 어렸다. 고구려 초기 왕족의 성씨는 고(高)씨인지 해(解)씨인지 불분명하므로 호동의 성씨 역시 명확하지 않다. 낙랑공주와의 혼인 기원후 32년(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 호동이 옥저.. 더보기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2) 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 정유재란과 종전 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곽재우는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 더보기
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그 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간 정사(政事)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권율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 더보기
김종직, 조의제문,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다. 김종직, 조의제문,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다.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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