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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사상, 평가, 성삼문과의 비교,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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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사상, 평가, 성삼문과의 비교

신숙주는 다국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 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의 사서육경 외에도 풍수지리학과 노장 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세조의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하였으며, 사서 오경의 구결을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동국정운》, 《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하였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 온 후 몇번 일본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 이를 토대로 일본의 풍물과 관습, 언어, 정치 세력, 일본의 기후, 자연 조건, 일본과의 외교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향후 일본과의 교린외교에 참고가 되게 하였다. 또 신숙주는 그림을 잘 그려서 일본과 여진의 지도, 베이징의 지도를 만들었으나 후에 모두 실전되었다. 그의 저서 중 사성통고는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이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四聲通解)를 짓기도 했다.

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때에 과거 시험의 주시관(主試官)을 13회나 과거 시험을 하여 합격자들을 선발하여, 좌주 문생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개혁관

그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했다. 성삼문과 신숙주의 정치개혁에 대한 처방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성삼문은 '제도개혁보다 마음을 바로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반면 신숙주는 '제도개혁보다 인재를 바로 등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이 바뀌지 않고는 제도의 개혁이 어렵다고 판단했고, 개혁이 어려운 이유로는 기득권의 반발을 지목했다.

 

미신에 대한 배격 

그는 무속과 점술 등을 미신이라며 비판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10월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귀국하는 길에 현해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될 위험이 닥치자, 당시 사공들은 점을 쳐서 배가 좌초될 위기에 처한 것은 그 배에 승선한 임신한 여자 때문이라는 원성이 일며 그녀는 바다에 던져 용왕의 진노를 풀어야 된다고 하였다. 이 임산부는 바다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으나 신숙주가 나서서 이를 말렸다. 그는 기후의 변화는 자연의 뜻이라며 '매사를 어떻게 점술과 예언에만 의존하려 하느냐'며 '남을 죽여서 나 살기를 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라면서 말렸다. 얼마 뒤 구름이 걷히면서 풍랑이 멈추었고, 그의 기지로 임산부는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명분론에 대한 거부

그가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을 때 명나라는 영락제와 건문제 사이의 왕위 다툼이 끝나고 이른바 '인선의 치'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영락제와 건문제의 제권 다툼과 영락제가 정화 등을 중용하여 문치와 무역으로 명나라를 번영시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그는 신흥국가로서 흥륭하는 명나라의 모습을 보며, 조선의 선비사회를 지배하는 명분론과 의리론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첫 스승인 윤회를 통해 정도전과 하륜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스승 정인지를 통해 정몽주의 학통 등 다양한 스승의 학문을 접한 것도 그가 한가지 사상에 얽매이지 않는 요인이 됐다. 이것이 뒤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현실정치에서 길을 달리 걷게 된 사상적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그는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명분은 폐기처분해야 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는 '항상 근본적인 것만 밝히고 지나치게 세세한 것은 따지지 않았으며 대사를 처리하고 대의를 결단하는 것이 강하(江河)를 터 놓은 듯 시원스러웠다'고 한다.

 

성삼문과의 비교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

 

세조와의 관계

신숙주는 계유정난의 공적 면에서는 한명회보다는 적을지는 모르나, 세조에게 끼친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인 친분에서는 누구보다 앞섰다. 따라서 정사를 논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숙주는 단연 세조의 오른팔격이었다. 세조는 그의 호방하면서도 치밀한 성품을 높이 샀다.

 

평가와 비판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쫓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되었다.

 

긍정적 평가 

사돈이기도 한 용재 이행은 그를 많은 지식을 집대성하고 실전, 실무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연구에 오래 참여하였고 집현전에 근무하는 동안 퇴근도 잊고 독서실에서 연구로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당직을 자청하였고 당직이 아니라도 서고에서 날을 새는 그의 열정을 세종은 높이 평가했다. 세종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문무에 두루 능하여 국사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를 만나서는 계책이 행해지고 말은 받아들여졌다.

세종과 세조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여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렀다.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朝日)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의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하는 등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어학자, 외교가, 저술가, 번역가, 경륜가, 군사전문가, 명재상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세조의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로 사림파에 의해 그 공로가 폄하되었다. 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 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는 해도 있다. 사후 50년 뒤에 편찬된 1525년의 용재총화에는 신숙주를 가리켜 '그 문장과 도덕에서 모두 일대의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정난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아 한글 연구와 보급, 전승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대의를 따른 과감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는 것을 돕고 많은 중요한 직책에 올랐기 때문에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하 중 하나였고, 훈민정음을 창조할 때 크게 공헌한 신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의 공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부정적 평가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신숙주는 세종의 유언을 저버린 배신자, 동료들을 배신한 변절자로 지목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이라는 용어는 중종 이후 사림파가 만들었다. 이는 사림파의 대의 명분이라는 가치관에 입각한 폄하였다. 또한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돌면서 김시습 등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세조의 공신으로 있을 때는 왕의 뜻에만 편승하여 승순(承順)만을 힘썼고, 예종 때에는 형벌을 내릴 때 공정함을 잃었으며, 남이와 강순의 억울함을 구제하지 않았다 하여 당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자광 등이 남이를 처형할 때 동조한 점 역시, 남이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맞물려서 그에 대한 비난의 소재의 하나로 활용됐다. 민족적 절의를 고양시킬 필요가 절실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쓰여진 일종의 역사서인 [김택영]의 《한사경》에는 세조 즉위 전후의 생사를 오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비 송씨를 노비로 들이겠다고 청했다는 허구적이면서도 다소 선정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였다.

한때 신숙주는 지조와 의리가 강조되던 시대에 쓰여진 이광수의 《단종애사》나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목메이는 여자》 등의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야사,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만을 신뢰하여 신숙주를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하나쯤은 읽고 감동을 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꿈 많던 학창 시절에 ‘흙’을 읽으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고,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首陽大君)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申叔舟)에 분노한다. 특히 성삼문이 국문(鞠問)을 당하고 죽던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 윤(尹)씨가 남편을 향해 오랜 동지인 성삼문과 함께 절의를 지켜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락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비감(悲感)함을 금할 수 없다. 이같은 야사(野史)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신숙주와 성삼문의 정치적 공과나 선악을 따질 때면 성삼문의 편을 드는 데 익숙해졌다. 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것이다.


또한 소설 《단종애사》 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부끄러워해 부인 윤씨가 자살했다는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 윤씨는 자연사로 죽었으며 사망 시기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

 

현대의 평가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한 후로 그에 대한 비판은 다소 수그러들었고,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조명 여론도 나타났다. 그의 묘소인 경기도 의정부의 신숙주 묘는 1970년대까지도 버려졌다가 1980년 이후부터 신숙주의 역할에 대한 조명과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면서 비로소 사료와 신숙주의 작품, 저서들도 정리, 재출간되고 버려져 있던 묘소도 정비되었다. 전남 나주군 오룡동에 있던 그의 외가와 생가도 대한민국 수립 이후 1980년대부터 성역화와 재정비가 시작되었다. 한글학회에서는 1971년 10월 9일 한글의 날에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다. 충북 청원군(현재는 청주시로 승격)에서는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 등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를 선정했다. 2007년 9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문학비가 세워졌다. 묘소는 의정부 교도소 건너편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있다.

 

일화

신숙주에게는 평생 그를 주변에서 호위하며 미래를 예지해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세조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구치관을 불러서 구정승이라 불렀다. 그러자 구치관이 대답하자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왜 새 정승이 대답하느냐며 구치관, 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신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새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가 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다.

한번은 신숙주가 술좌석에서 세조의 비위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였다. 화가 난 세조는 참고 있었는데, 그는 평소 새벽에도 일어나 책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한명회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왕이 사람을 보낼 것이니 불을 끄고 자라고 일러주었다. 그날 새벽 그는 책을 읽지 않고 불을 끄고 있었고, 세조가 보낸 승지와 내관은 그가 취해서 자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신숙주 사후 사람들은 음식을 한 지 일주일만에 상하는 식용 나물을 그의 이름을 빗대 숙주나물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조롱하였다. 또한 숙주나물을 요리할 때 머리부분을 맷돌이나 방망이로 짓이기는데 이것을 두고도 신숙주를 짓이기는 것이라며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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