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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의 실제, 야사속의 함흥차사 함흥차사의 실제, 야사속의 함흥차사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는 태종 이방원이 저지른 일(왕자의 난)과 그것을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를 바라보던 백성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민정중이 쓴 《노봉집》(老峯集)에 나오는 박순의 시장(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건 경위 함흥차사를 보내고 태조가 답한 일을 한국사 학자 이덕일과 이회근의 연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398년 태.. 더보기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다.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더보기
최립, 선조 때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이다. 최립, 선조 때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이다. 최립(崔岦, 1539년 ~ 1612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 겸 문신이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본관은 통천(通川). 율곡 이이 등과 함께 선조 때의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로,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과 명필로 알려진 석봉 한호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수옹 송갑조는 그의 문인이었다.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유년기 1539년(중종34)개성에서 부친인 진사 최자양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8대조는 조선초의 명장인 최운해이고, 5대조 최로는 명필로 알려졌고, 절충상호군으로 단종 충신단에 배향된 인물이다. 최립은 붓을 잡을 만한 .. 더보기
한석봉, 글 솜씨가 왕희지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고 비유하다. 한석봉, 글 솜씨가 왕희지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고 비유하다. 한호(韓濩, 1543년~1605년)는 조선의 문신·서예가이다.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후세에 서예의 명인이라 불렸으며, 명나라의 명필가 주지향(朱之香)은 한호를 가리켜 “왕희지(王羲之) 및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비유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생애 한호는 1543년에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언공이며, 정랑(正郞) 한관(韓寬)의 손자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에게 글을 배웠으나 10세에 조부까지 여의었다. 이후 집안의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다. 12세에 영계 신회남의 문하에 들어갔다. 1567년(명종 22) 25세 때 진사시(進士試).. 더보기
감은사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완공하다. 감은사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완공하다. 감은사지(感恩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인 감은사의 터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발굴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 더보기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향토삼영걸로 불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향토삼영걸로 불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 徳川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 1543년 1월 31일 ~ 1616년 6월 1일)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센고쿠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향토삼영걸로 불린다. 가계는 미카와의 고쿠진 마쓰다이라 씨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하였으며, 승전 이후 에도 막부를 개창하여 첫 쇼군(1603년 ~ 1605년)이 되었다. 1605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오고쇼의 자격으로 슨푸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묻혔으며, 도쇼다이곤겐(일본어: 東照大権現)이라는 시호를 얻.. 더보기
낙화암,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다. 낙화암,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다.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 더보기
무령왕릉, 7호분 벽돌무덤, 양나라로 부터 들여온 굴식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 7호분 벽돌무덤, 양나라로 부터 들여온 굴식벽돌무덤이다. 무령왕릉 (武寧王陵)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7번째로 발견된 고분으로, 백제 무령왕과 그 왕비의 능이다. 1971년 7월 7일 처음 발굴되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뒤꽂이, 금제 심엽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지명 : 송산리)이다. 송산리 고분군과의 관계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고분군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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