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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신숙주,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이 묻혀지게 되다. 신숙주,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이 묻혀지게 되다. 남이의 옥사 전후 1468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된다. 1468년 세조가 병으로 죽고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신숙주는 한명회, 구치관,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희왕후와 함께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가 발생하자 그는 유자광 등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 남이 장군과 강순 등을 심문한 뒤 숙청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 더보기
신숙주, 단종복위운동 동참을 거절하다. 신숙주, 단종복위운동 동참을 거절하다. 사육신의 난과 단종복위운동 신숙주는 성삼문에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였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자네와는 모시기로 한 주군이 달라져서 이제 가는 길도 어긋났지.. 더보기
신숙주의 사상, 평가, 성삼문과의 비교, 일화 신숙주의 사상, 평가, 성삼문과의 비교 신숙주는 다국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 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는 유교의 사서육경 외에도 풍수지리학과 노장 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세조의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하였으며, 사서 오경의 구결을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동국정운》, 《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하였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 온 후 몇번 일본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 이를.. 더보기
신숙주, 변절하여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다. 신숙주, 변절하여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다.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 (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 (음력 6월 21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사람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 더보기
성삼문 평가, 신숙주와의 비교, 성삼문의 시조 성삼문 평가, 신숙주와의 비교, 성삼문의 시조 성삼문의 평가 후일 남효온의 사육신전 등을 통해 성삼문은 충절, 절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작가인 이광수의 단종애사 등은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한국의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는데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 더보기
성삼문,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다 김질의 밀고로 멸문 당하다. 성삼문,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다 김질의 밀고로 멸문 당하다.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더보기
사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하다. 사육신 묘 사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하다.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를 이르는 말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사육신이 세조와 덕종, 예종 삼부자를 연회장에서 척살할 계획으로 유응부, 성승, 하위지를 별운검으로 세조 3부자의 뒤에 세 웠다가 3부자의 목을 벨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동조자 중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함으로써 실패로 돌아 간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관련자 500~800여명이 처형, 학살되었으며, 사육신 중 현재 박팽년과 하위지만이 직계 후손이 전한다. 그 밖에 사육신 가문의 .. 더보기
한명회, 계유정난과 세조반정을 주도하다. 압구정도 (정선) 한명회, 계유정난과 세조반정을 주도하다.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음력 10월 25일) ~ 1487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4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 이며 외척이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 시호는 충성(忠成) 이다. 두 딸은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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