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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태조 왕건의 정책, 취민유도, 사심관 제도, 기인제, 역분전 태조 왕건의 정책, 취민유도, 사심관 제도, 기인제, 역분전 취민유도(取民有度)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내세운 조세 정책의 기본 이념이다. 취민유도는 백성에게 조세를 수취할 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유교적 민본 이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분열이 신라 사회의 모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며, 그러한 사회 혼란의 근본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조세 제도에서 비롯된 경제 모순에 있다고 보았다.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호족들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었다. 사심관(事審官)은 고려 때의 관직이다. 해당지방의 관리를 지배, 감독하는 기구인데, 그 임무는 부역의 공평, 풍속의 교.. 더보기
선죽교, 정몽주의 피얼룩이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으로 남다. 선죽교, 정몽주의 피얼룩이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으로 남다. 선죽교(善竹橋)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 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몽주의 피얼룩은 후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구가 1947년 그곳을 방문할 때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특징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더보기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다.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군주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다.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 더보기
견훤, 금성전투, 공산전투, 고창전투, 운주성 전투, 신검의 정변 견훤, 금성전투, 공산전투, 고창전투, 운주성 전투, 신검의 정변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수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금성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됨과 동시에 바다를 .. 더보기
견훤, 백제 부흥운동으로 무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의 군주가 되다. 견훤, 백제 부흥운동으로 무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의 군주가 되다. 견훤(甄萱, 867년 ~ 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 ~ 935년 음력 3월)은 신라 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시조이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더보기
혜종, 기질이 호탕하고 지혜와 용맹이 뛰어나다. 혜종, 기질이 호탕하고 지혜와 용맹이 뛰어나다. 혜종(惠宗, 912년 ~ 945년 10월 23일 (음력 9월 15일))은 고려 제2대 국왕(재위: 943년 ~ 945년)이다. 자는 승건(承乾), 휘는 무(武), 묘호는 혜종, 시호는 인덕명효선현고평경헌의공대왕(仁德明孝宣顯高平景憲義恭大王)이다. 왕건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이다. 외가의 가세가 미약하여 지위의 위협을 받게 되자 부왕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고려(高麗) 건국 직후 그를 바로 정윤으로 삼은 뒤에 921년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하였다. 재위 3년만에 사망하였으나 사망원인은 불명확하다. 출생과 책봉 혜종은 912년 나주 흥룡동에서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 더보기
공산전투, 왕건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다. 공산전투, 왕건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다. 공산 동수 전투(公山棟藪戰鬪)는 후삼국 시대인 927년 신라 공산(公山, 현 팔공산) 동수(棟藪, 현 지묘동)에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른 전투로 견훤이 왕건군을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이곳에서 신숭겸 등 8명의 장수가 전사해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는 설화도 있고 반야월 등 대구의 대표 지명들이 이 전투에서 생겼다. 배경 후삼국 시대 당시 고려와 후백제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냈으나 926년 9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고려 근품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로 고려와 후백제는 수차례에 걸쳐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대체로 고려를 지지하였는데, 이는 견훤이 신라의 무관 출신임에도 불구.. 더보기
마의태자,금부대왕,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마의태자,금부대왕 어떻게 천 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년~?)는 신라 마지막(제56대) 왕 경순왕의 왕자이다. 성은 김(金)씨, 휘는 일(鎰 또는 溢)이라 전하며, 일명 금부대왕 또는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도 불린다. 신라왕후의 적자임과 동시에 화랑 효종랑의 손자이다. 5남인 김분과 함께 고려에 귀순하려는 아버지 경순왕을 만류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라를 떠나 금부리에서 충신 지사 일민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숭념을 발의하였다. 후에 개골산(皆骨山)에서 대절을 지켰으므로 그 증손에 이르러서야 대의를 실행한다는 명분으로 나라에 출사하게 되었다. 이찬을 지낸 효종랑의 적자인 경순왕은 사직이 불안정한 때에 대기에 올라 방국 수호의 책무를 지게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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