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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홍건적의 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다. 홍건적의 난,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다. 홍건의 난(紅巾之亂) 또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원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건적은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등으로도 불렸다. 개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더보기
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李仁任, ?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간신(奸臣), 권신權臣)이자 시인(詩人)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한때 신돈(辛旽)의 문하에 있었으며, 홍건적과 원나라의 최유 등을 물리쳤고,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었다.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백부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경상북도 출신이다. 호(號)는 승암(勝巖)이며 시호(諡號)는 황무(荒繆)이다. 생애 고려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대제학 이조년의 손자로 태어난 기록만 알려져 있는데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李褒)이다. 본관은 .. 더보기
창왕, 폐가입진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다. 창왕, 폐가입진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다. 창왕(昌王, 1380년 9월 6일 (음력 8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3대 국왕(재위: 1388년 ~ 1389년)이다. 휘는 창(昌)이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식 시호는 없다. 이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연관이 있다. 후에 고려의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그밖에 후폐왕(後廢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위와 폐위 배경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인 왕창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 더보기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다. 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다. 이자춘(李子春, 1315년 ~ 1361년 1월)은 원의 관료이자 고려의 무신이며 조선의 추존왕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몽골식 이름은 울루스부카(Ulus-Buqa, 한국 한자: 吾魚思不花 오어사불화)이다. 원나라의 천호로 있다가 1356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고려에 귀순하였다. 대중대부사복경과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 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추증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성계에 의해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환조 연무성환대왕(桓祖 淵武聖桓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생애 아버지 이춘(李椿)의 사후 형인 이자흥(李自興)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4)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4) 세자 책봉 문제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석방과 교육활동 1377년에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지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 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더보기
진안대군, 이방우, 술을 마시고 병이 나서 졸하다. 진안대군, 이방우, 술을 마시고 병이 나서 졸하다. 진안대군(鎭安大君, 1354년 ~ 1394년 1월 15일(1393년 음력 12월 13일))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며, 조선 초기의 왕족, 시인이다. 이름은 이방우(李芳雨)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사호(祠號)는 청덕(淸德), 시호(諡號)는 경효(敬孝)·정의(靖懿)이다. 생애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안변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고려 말에 과거(문과)에 급제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에 부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처자를 데리고 교주강릉도 철원 보개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국가 일에는 일체 간여하지 않고 서해도 해주로 옮겨 가서 서너달 살다가,.. 더보기
정종,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상왕으로 물러나다. 정종,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상왕으로 물러나다. 정종(定宗, 1357년 7월 18일 (음력 7월 1일) ~ 1419년 10월 15일 (음력 9월 26일), 재위: 1398년 ~ 1400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초명은 방과(芳果), 휘는 경(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원(光遠)이다. 1398년부터 140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아우인 정안군(훗날 태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선양한 뒤에는 아우 태종이 인문공예 상왕(仁文恭睿 上王)으로 존호(尊號)를 올렸고, 사후 조선 중후기까지 시호인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다. 생애 정종은 공민왕 6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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