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썸네일형 리스트형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 (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준비과.. 더보기 갑오개혁, 세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운동 갑오개혁, 세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운동 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년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8월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 개혁 운동을 말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불렸다. 내각의 변화에 따라 세분화하여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으로 나눌 수 있으며, 후에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군국기무처 개혁의 기간과 내용 한말(韓末)에 일어난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혁명 등은 극도로 부패한 조선왕조와 양반계급에 대한 민중의 자아 각성에 의한 반발이며, 누습에 젖은 수구파(守舊派)에 대하여 신제도로 개혁하려는 개화파의 혁신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자아각성과 근대적 혁명을 기도한 동학혁명은 마침내 외세의 개입으로 소기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더보기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丙寅洋擾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 더보기 임오군란,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으로 훈련도감 구식 군인들이 항쟁하다. 임오군란,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으로 훈련도감 구식 군인들이 항쟁하다.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6월에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개화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5영을 파하고 2영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10년간 월급이 체불되었고 나중에는 군대에서 쫓겨나.. 더보기 경복궁 건청궁, 슬픈 역사의 현장 건청궁, 슬픈 역사의 현장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슬픈 역사의 현장이에요. 건청궁을 들어설때면 가슴 한켠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것은 아마도 이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건청궁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갖춘 구조로 사대부의 집과 흡사한 느낌이에요. 화려하지도 않은데다가 궁이라고 말하기에는 작다는 생각도 듭니다. 건청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봉안한다는 명분 아래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고종 10년에 지어진 궁이에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서쪽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태원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새로운 어진 봉안 시설이 필요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마도 임시거처나 휴식공간으로 삼았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건청궁은 임금의 침전이나 편전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한가로이 쉴 수 있기로는 안성맞춤이었.. 더보기 [경복궁] 강녕전, 왕의 생활공간 [경복궁] 강녕전, 왕의 생활공간 왕의 생활 공간이었던 강녕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좀처럼 휴가도 없었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무를 보느라 바빴던 임금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했을까요? 향오문은 정무를 마친 임금이 사정전에서 나와 내전, 곧 강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내전이 시작되는 문이 향오문입니다. 향오는 '5를 향해 들어가는 문' 입니다. 여기서 '오' 를 가리키는 것은 오복입니다. 오복이란 수, 부, 강녕, 유호덕 (덕을 베품), 고종명(편안한 죽음) 입니다. 강녕은 오복의 세 번째 덕목인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강녕은 오복의 중심이자 모든 복을 아우릅니다. 이렇게 뜻을 하나 하나 알고 지나가니, 평소에는 그저 많은 문 중의 하나였던 .. 더보기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경복궁은 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보이기 위해 태조4년에 세워진 조선시대 최초의 궁궐로 '만년토록 큰 복을 누려 번성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광화문 광장이 조선시대에는 행정과 정치의 중 심거리였던 육조거리였다. 경복궁은 조선 초 200여년간, 조선후기 고종 때 의 법궁이었다. 안타깝게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린 후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원래보다 훨씬 더 크게 7000칸이 넘는 규모로 중건했다. 그 후로 고종 때에는 다시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후 로 일제는 조선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기 위해 경복궁을 파괴하 기 시작했다. 특히, 191.. 더보기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