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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품일, 화랑 관창의 아버지, 아들 관창과 나당전쟁에 출전하다. 김품일, 화랑 관창의 아버지, 아들 관창과 나당전쟁에 출전하다. 김품일(金品日, ? ~ ?)은 신라 태종 무열왕 때의 장군이다. 금관가야 왕족이며, 대야성주 김품석의 동생, 화랑 관창의 아버지이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아들 관창과 함께 출전하였다. 664년 문무왕 때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공격하였다.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쳐들어갈 때, 귀당총관으로서 공을 세웠으며, 백제의 유민들이 소동을 일으킨 63개의 성을 빼앗았다.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진골(眞骨) 출신으로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생애 660년 (태종무열왕 7)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김흠순(金欽純) 등과 함께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략하였다. 백제.. 더보기
유일한 박사,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고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다. 유일한 박사,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고 한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다.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자는 천여(天汝), 본관은 진주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유언으로 남겼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 유년기 시절 유일한은 조선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과 김기복(金基福)사이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 더보기
문익점,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다. 문익점, 목화의 전래로 인해 한국의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다.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은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 더보기
박제상, 망부석 설화,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출해 신라로 보내다. 박제상, 망부석 설화,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출해 신라로 보내다. 박제상(朴堤上, 363년 ~ 418년 추정)은 신라의 충신이다. 자는 중운(仲雲), 호는 관설당(觀雪堂)·도원(挑園)·석당(石堂) 등이다. 혁거세 거서간의 9세손, 파사이사금의 5세손이며, 영해 박씨(寧海朴氏)의 시조이다. 《삼국유사》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생애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직을 수행하였다. 눌지 마립간 즉위 10년(426년)에 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으며, 이어서 야마토에 볼모로 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하러 건너갔다. 왕자를 구출하여 신라로 보낸 후, 그를 신하로 삼으려는 인교 천황의 설득을 거절하다가 죽었다. 행적에 대해서는 .. 더보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韓國을 빛낸 百名의 偉人들)은 박인호(박문영)가 작사, 작곡하여 1991년에 최영준, 노사사(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로 발표한 노래이다. 한국의 역사인물을 주로 수식문과 함께 나열한 가사로, 대한민국에서 높은 대중성과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인물을 대략적인 연대 순으로 5절에 걸쳐 수식과 함께 나열했다. 인물이 아닌 집단도 있으며 실존 인물 외에 가공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음절상의.. 더보기
이완용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이완용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긍정적 평가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더보기
임영대군, 세종의 넷째 아들, 세조 반정을 지지하다. 임영대군, 세종의 넷째 아들, 세조 반정을 지지하다. 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璆, 1420년 1월 6일 ~ 1469년 1월 21일)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족, 정치인으로, 조의 제4대 왕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구(璆),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헌지(獻之)이다. 둘째 형인 수양대군처럼 무술에 능하였으나 궁녀와 대궐의 하녀들과의 성추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계유정난 이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을 지지하여 그를 도왔다. 예종 때의 정승 귀성군 이준의 아버지였고, 영의정 신승선의 장인이며,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는 그의 외손녀였다. 또 단경왕후의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그의 외손자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생애 초반 임영대군 이구는 1420년(세종 2년) 1월 6일.. 더보기
쇼와 일왕, 무조건 항복 선언 디지털 복원 공개 쇼와 일왕, 무조건 항복 선언 디지털 복원 공개 쇼와 천황 또는 일왕, (1901년 4월 29일 ~ 1989년 1월 7일)은 일본의 제124대 천황이다. 본명은 히로히토), 문화어: 히로히또)이며, 어릴 적에 쓰이던 궁호(宮號)는 미치노미야이다. 또, 쇼와 천황이 사용하던 오시루시는 어린 대나무를 상징했다. 다이쇼 천황(요시히토)과 구조 공작 가문의 당주 구조 미치타카의 딸 데이메이 황후(구조 사다코)의 맏아들이다. 1921년에 부황 다이쇼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으며, 1926년 12월 25일에 즉위하여 1989년에 죽을 때까지 재위했다. 메이지 천황이 확립한 일세일원제에 따라 재위 기간 동안 쓴 연호는 쇼와( 단 하나뿐이었다.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부황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한 그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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