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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 무신정권, 권력을 남용하다 처형되다. 고려사 이의민 이의민, 무신정권, 권력을 남용하다 처형되다. 이의민(李義旼, ? ~ 1196년 5월 7일 (음력 4월 8일))은 고려 중기의 무신, 군인, 정치가이자 무신정권의 지도자이다. 본관은 정선(旌善)이며 종교는 불교이다. 그는 본래 안남국 리 왕조의 후손으로 5대조 이양혼이 베트남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로 망명하였다. 경대승이 갑작스럽게 죽자 집권하였다. 집권 이후 권력을 남용하다가 1196년 이른 봄 아들 이지영이 동부녹사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은 사건으로 최충헌, 최충수 형 제의 정변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경상도 경주 출신이다. 고려 명종 시기 1183년부터 1196년까지 왕 대신 실권을 잡았다. 출생과 가계 출생년도는 미상으로 경주의 소금장수 이선을 아버지로 영일현 옥령사의 여종을 어머니로 .. 더보기
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기관 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기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은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한 후에 설치한 출선기관으로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다. 흔히 정동행성이라고 줄여서 부르며, 일본행성(日本行省)·정동성(征東省)으로도 불렸다. 개요 쿠빌라이는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 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병 한다(원나라의 일본 원정). 1274년 제1차 일본 원정에서 대마도,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데에서 그친 원나라의 세조(世祖)는 1280 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제2.. 더보기
쌍성총관부, 공민왕,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다. 쌍성총관부, 공민왕,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1258년에 원나라가 함경남도 화주(和州 : 영흥)에 설치한 통치기구이다. 쌍성총관부는 동녕부와 함께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에 직속령이 되는 영토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통치 기간이 100여 년간 유지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주권 회복 및 영토 회복을 위한 북벌 정책의 핵심으로, 이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격 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설치 1258년(고종 45년)에 원나라의 별장 산길(散吉)과 보지(普只)가 동여진(東女眞)을 경유하여 장성(長城) 이남을 침공했다.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 (竹島)로 이동하였다. 그.. 더보기
공민왕, 반원자주화, 개혁정치, 성균관을 재건하다. 공민왕, 반원자주화, 개혁정치, 성균관을 재건하다.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 우왕 2년에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며, 같은 왕 11년에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왕(恭愍王)이다.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伯顔 帖木兒, 몽골어:、Bayan Temür)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 더보기
인조반정,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비판하며 능양군을 옹립하다. 인조반정,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비판하며 능양군을 옹립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배경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 더보기
무신정변, 정중부 보현원에서 구테타를 일으키다. 고려사 정중부 무신정변, 정중부 보현원에서 구테타를 일으키다. 무신정변(武臣政變)은 고려시대 의종 24년(1170년) 8월에 상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의 휘하장수들이 보현원(普賢院) 에서 일으킨 쿠데타이다. 무신들의 주도로 일어난 정변이었기 때문에 무신의 난(武臣의 亂)이라고 부르고 정변이 일어난 해가 경인년이었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의 亂)이라고도 부르며 정변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중부의 이름을 따서 정중부의 난(鄭仲夫의 亂)이라고 부 르기도 한다. 1170년 이후 계속된 무신정권은 100년 후인 1270년, 마지막 무신집권자인 임유무가 살해당하기까지 100년간 존속되었다. 반란 배경 의종의 유흥으로 문신이 무신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고 내시마저 궁궐을 좌지우지하자, 불만이 쌓인 무신들은 상.. 더보기
안시성 전투, 고구려와 당 전쟁, 끈질긴 항전으로 고구려가 승리하다. 안시성 전투, 고구려와 당 전쟁, 끈질긴 항전으로 고구려가 승리하다.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당 전쟁 중에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태종이 지휘하는 군대가 대규모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3개월가 량 안시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끈질긴 항전으로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가 승리한 싸움이다. 전투 개요 644년 6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당태종은 마침내 고구려의 침략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 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의 군대도 다수 동원되었으며 대다수의 군대가 예전 수나라 때의 원정군과는 질적으로 다 른 .. 더보기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어가다. 영창대군의 묘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죽어가다.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 ~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 조선 제14대 왕 선조와 그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들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의(㼁), 본관은 전주(全州) 이다. 선조에게는 적자와 서자를 합해 총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영창대군은 선조가 55세 때 얻은 유일한 적자이다. 이 때문에 영의정인 소북의 유영경등은 한때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했고, 이는 후에 그가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원인 이 되었다. 생애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에 선조와 인목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 태어나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에 강화 유배지에 서 사망했다. 선조는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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