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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복상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예송논쟁, 복상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당초 허목.. 더보기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 더보기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다.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배경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이 즉위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인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및 정권과 병권을 쥐고 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을 통해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해야 할 대비, 대왕대비 등의 부재 상황에서, 세종의 영특한 아들들.. 더보기
허준, 동의보감 천하의 보(寶)를 만들다. 허준, 동의보감 천하의 보(寶)를 만들다. 허준(許浚, [2013]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직은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다. 용천부사(龍川府使) 허윤(許碖)의 둘째아들이다. 허준 생애 어린시절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윤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글을 익혔으며,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通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를 어우르는 동양의 종합적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허준의 학문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훗날 동의보감의 집필에 지대한 영.. 더보기
무라카미 하루키,<여자 없는 남자들>, 여자를 떠나 보낸 상실한 남자들의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여자를 떠나 보낸 상실한 남자들의 이야기 은 여자들의 부재로 상실한 남자들을 모티프로 삼은 단편 소설집입니다.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구성의 「예스터데이」와 프란츠 카프카의 의 오마주 를 제외하면 여섯 편 모두 중년 남성이 주인공입니다. 여자를 제외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여자를 떠나보내거나, 이별한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병으로 인해 사별하거나(「드라이브 마이 카」),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하고(「기노」), 본인의 뜻으로 일부러 깊은 관계를 피하는 경우도 있으며(「독립기관」), 혹은 이유도 모르는 채 타의로 외부와 단절되기도 합니다.(「셰에라자드」). 은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주제로 남녀의 관계,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을 읽으며 베어내면 붉은 피를 .. 더보기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 대첩(鳴梁大捷) 또는 명량 해전(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 또는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전선은 333척)을 물리친 세계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배경 조선 수군의 재건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 더보기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죽음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7년간의 전쟁이 끝나다!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죽음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7년간의 전쟁이 끝나다! 노량해전(露梁海戰)혹은 노량대첩(露梁大捷)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배경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했다가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에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더보기
한산도 대첩, 조선 수군 일본수군을 학익진으로 크게 무찌르다! 한산도 대첩, 조선 수군 일본수군을 학익진으로 크게 무찌르다!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학익진 배경 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은 일본 육군에 계속 패전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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