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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문체반정, 패관소설의 수입을 금하고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다. 문체반정, 패관소설의 수입을 금하고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조선 정조가 당대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이 참신한 문장들을 패관소품이라 규정하고, 기 존 고문(古文)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발단 개혁군주라고 하는 정조가 새롭게 유행하는 소품체 문체를 걱정하며 고전의 문체로 돌아가라고 신하들과 선비들에게 명했다. 이를 위해서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패관소설과 잡서 등의 수입을 금하였으며, 중국의 고문들을 신간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조가 책과 사상을 탄압하는 등 보수적인 면모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는 반면에, 단순히 정조가 남인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박지원을 볼모로 삼기 위한 정치적인 노림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경과 .. 더보기
일성록, 국왕의 일기 일성록, 국왕의 일기 이 책은 1760년(영조 36)에서 1910년(융희 4)까지 151년 동안의 국정 운영 내용을 매일매일 일기체로 정리한 국왕의 일기(*국왕을 3인칭인 ‘상(上)’이 아닌 1인칭 용어인 ‘여(予: 나)’로 표기)이다. 임금의 입장에서 펴낸 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다. 필사본으로 한 질만 편찬된 유일본이며 총 2,329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전하고 있으나 21개월분이 빠져있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이다. 정조는 [논어(論語)]에서 증자(曾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 더보기
박제가,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 박제가,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하고 통찰했던 선각자 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 ~ 1815년 4월 25일)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또는 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박제가 1778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9년 3월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그 뒤 전설서 별제와 1791년 임시 군기시정, 1792년 군기시정 등을 거쳐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 .. 더보기
규장각,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문화정치를 표방하다. 규장각,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문화정치를 표방하다. 규장각(奎章閣)은 조선 후기의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이다.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 (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에 세워진 규장각 연혁 세조 때에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을 두기를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 때에는 작은 전각을 마련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으나, 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 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규장각은 .. 더보기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영조의 차남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봉수당에서의 회갑연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이었으나 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 ​(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로도 알려져 있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 더보기
사도세자, 장조인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는 당쟁 때문이었나? 사도세자, 장조인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는 당쟁 때문이었나? 장조(莊祖,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윤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 더보기
영조,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을 실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다. 영조,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을 실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다.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3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3월 5일) )는 조선의 제21대 임금 (재위,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이다.성은 이(李), 휘는 금(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숙 (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그러나 신임사화 등으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영조의 21살때의 모습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키게 된다. 숙종(肅宗).. 더보기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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