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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다. 소수림왕,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다. 소수림왕(小獸林王, ? ~ 384년, 재위 : 371년~384년)은 고구려 제17대 군주이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맏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소수림왕은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 소수림왕은 371년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백제 근초고왕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부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에게 국가의 체제 정비와 더불어, 넓은 영토와 백성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 더보기
고국원왕, 사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 사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故國原王, ? ~ 371년, 재위: 331년 ~ 371년)은 고구려의 제16대 국왕이다. 이름은 사유(斯由) 또는 쇠(釗)라고 하며 미천왕의 아들이다.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다. 369년 백제를 공략하려다가 패하였고 371년의 2차 백제 공략에서 전사하였다. 생애 314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고, 335년에는 신성(新城)을 쌓았으며, 342년에는 환도 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전연(前燕)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東晉)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전연과의 전쟁 오호십육국 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 .. 더보기
근초고왕,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다. 근초고왕,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다. 근초고왕(近肖古王, ? ~375년, 11월 재위: 346년 9월~375년 11월)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중국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 왕(照古王),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찬 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 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임에도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 54개 연맹체 전체를 통일하였고, 북으로.. 더보기
최익현,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 최익현,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 의병장 종교 유교 부모 아버지 최대(崔岱) 최익현(崔益鉉, 양력 1834년 1월 14일 / 1833년 음력 12월 5일 ~ 1907년 1월 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 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 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4년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 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정인홍,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 더보기
공명첩, 돈을 받고 벼슬을 팔다. 공명첩, 돈을 받고 벼슬을 팔다. 공명첩(空名帖)은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려고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하직(명예직) 임명장이며, 공명(空名)이란 “받는 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이란 뜻이며, 첩(帖)은 사령장 또는 임명장을 뜻한다. 중앙의 관원이 이것을 가지고 팔도를 돌면서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 공명첩이 그 기능을 하게 된다. 공명첩에는 벼슬을 내리는 공명도 신첩(空名告身帖)과 천인을 양인이 되게 하는 공명 면 천첩(空名免賤帖, 노비면천첩), 향리에게 역을 면제하는 공명 면 향첩(空名免鄕帖) 등이 있었다. 공명첩은 돈을 받고 벼슬을 팔았다는 점에서는 납속 수직 제도이며, 면천을 해 주었다는 점에서는 속량 제도의 일종이다. 또한 구휼에 필요.. 더보기
6·10만세운동, 3·1운동을 잇는 민중적인 항일운동 6·10만세운동, 3·1운동을 잇는 민중적인 항일운동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 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 기탁, 인쇄 직공 민경식, 이민재, 연희 전문의 이병립, 박 항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 천진, 천도교의 박대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 더보기
침류왕, 고구려에 적대적 외교 자세를 취하다. 침류왕, 고구려에 적대적 외교 자세를 취하다. 침류왕(枕流王, ? ~385년 11월, 재위 384년 4월~385년 11월)은 백제의 제15대 국왕이다. 근구수왕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진고도(眞高道)의 딸 아이부인(阿爾夫人)이다. 초고 왕계의 왕통을 이었으나 재위 2년째인 385년 11월 붕어하여 그의 어린 아들 아신(阿莘) 대신에 그의 아우 휘(暉, 진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적대적 기본 외교 자세를 취하였으며, 384년 왕위에 오르자 7월에 동진에 조공하였다. 이해 음력 9월 동진(東晋)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왔고 이를 계기로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다.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승려들의 열전을 모아 놓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의하면, 소수림왕.. 더보기
칠지도, 백제 왕세자가 왜 왕에게 하사한 칼 칠지도, 백제 왕세자가 왜 왕에게 하사한 칼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 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X-레이 촬영 결과 앞면에 十(십) 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소 노가미 신궁에서 ‘욱 차모(六叉鉾)’라는 명칭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73년 신궁의 궁사에 의해 명문이 발견되었고, ‘칠지도’로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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