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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환구단, 원구단,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다. 환구단, 원구단, 고종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다. 환구단(圜丘壇)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다.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157호로 지정된 환구단은 고종 대에 있었던 환구단 터로,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 자리이다. 한국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 고구려 태조대왕때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圜丘祭)는,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조선 초기에 제천의례는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하다가, 조선 .. 더보기
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다. 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다. 조선 문조(文祖)(1809년 9월 18일 (순조 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6월 25일 (순조 30년 음력 5월 6일))는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자 왕세자, 문인, 시인이며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성은 이(李), 휘(諱)는 영(旲), 호는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본관은 전주(全州)다. 1812년(순조 12년) 7월 왕세자에 책봉됐고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했으나, 청정 4년만인 1830년 병사했다. 아들 헌종 즉위 후 익종으로 추존됐고, 고종이 그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자 황제로 추존됐다.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불구하고 .. 더보기
흥선대원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흥선대원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평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 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화가이며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그의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친아버지이다. 1863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서원을 철폐 및 정리를 하여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 더보기
명성황후, 평가와 비판, 당시 생존의혹,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명성황후, 평가와 비판, 당시 생존의혹, 명성황후의 한글 편지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 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 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한테 겨냥하는 견제를 위.. 더보기
순종, 융희제, 기유각서 사건으로 허수아비 군주가 되다. 순종, 융희제, 기유각서 사건으로 허수아비 군주가 되다.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6일)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한반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혈통은 사실상 조선에서 유래하므로, 역사성의 편의상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조선의 제27대 왕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 성은 이(李), 휘는 척(坧)이다. 특징 상기한 바와 같이 그는 부황 고종과는 달리 조선 왕의 신분으로 재위한 기간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제27대 왕으로는 볼 수 없다. 그는 대한제국 황제 치세 시절 연호를 따 융희제(隆熙帝: 1907년부터 1910년까지 3년 재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력 성은 이(李), 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全州), .. 더보기
단발령, 일본인, 서양인들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다. 단발령, 일본인, 서양인들의 진언에 따라 고종은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다. 단발령(斷髮令)은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음력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의 칙령이다. 서양인,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다. 당일부로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1897년(건양 1년) 일단 철회되었으나, 1900년(광무 3년) 이후 광무개혁을.. 더보기
고종 양위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다. 고종 양위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다. 고종 양위 사건(高宗讓位事件)은 1907년 7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제위를 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 고종이 헤이그 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등을 보내 밀서를 전달하려 한 사실을 접한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책임을 추궁했고 ,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이 책임지고 퇴진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하려 했으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원인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에게 헤이그 밀사 편으로 밀서를 전달하였다.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 더보기
헤이그 특사 사건,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 特使 事件, 문화어: 헤그 밀사 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였던 사건이다. 배경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 하고자했다. 헤이그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을사늑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경과 고종은 1907년 4월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평화회의(정식 명칭..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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