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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이복형제 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이복형제 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움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그밖에 방석의 난, 혹은 정도전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이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라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복 형제간의 싸움이다. 원인 왕자의 난의 원인은 크게 세자 책봉 문제와 요동 정벌 준비에 따른 오해에서 비롯했다. 세자 책봉 문제 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正妻)가 있었는데, 한 명은 그가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 한씨이며 다른 한 명은 군공으로 입신양명한 그가 개경에서.. 더보기
선죽교, 정몽주의 피얼룩이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으로 남다. 선죽교, 정몽주의 피얼룩이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으로 남다. 선죽교(善竹橋)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시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 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몽주의 피얼룩은 후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김구가 1947년 그곳을 방문할 때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특징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되었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더보기
김재익,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다. 김재익,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다. 김재익(金在益, 1938년 11월 26일 ~ 1983년 10월 9일)은 전두환 정권 당시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정책, 정보화 정책, OECD 가입,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한 인물이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생애 일제 강점기였던 1938년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소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 당시 지주이자 우익반동으로 몰려 정치보위부에 검거되어 서울 수복 직전 대전에서 인민군에 의하여 처형되었고, 그의 형인 김재룡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전임강사로 일하는 중 해군CIC에 검거되었다가 개전 직후 불법적으로 한강변에서 총살되었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더보기
대가야,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는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다. 대가야, 고대국가 성립 직전까지는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다. 대가야(大伽倻) 또는 반파국(伴跛國)은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지역에 있던 6가야 중 하나다. 이름 유래 대가야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후기 가야연맹을 이끌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추정되는데 "대가야"라는 이름 자체는 가야연맹 전체의 국명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금관가야)도 사용했다. 우륵의 12곡의 상가라도가 이곳인데 상가라도의 명칭이 가야의 수도라는 의미로 이 시기에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가 어중간하게나마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로 이행했음을 시사한다. 건국 설화 시조 이진아시왕이 42년에 수로왕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와서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대가야를 세웠다고 한다. 역사 당초에 고령지역사 [변한] 12국 중의 반로국(半路國, 반파.. 더보기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왕위가 부자에게 정통적으로 세습된 국가이다.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왕위가 부자에게 정통적으로 세습된 국가이다. 금관가야(金官伽倻), 본가야(本伽倻)는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로, 신라에게 멸망하기 전 국명은 가락국(駕洛國)이었다. 가락국(駕洛國)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가야 연맹체의 맹주였다. 그러나, 4세기 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400년에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종발성 등 낙동강의 동쪽과 북쪽 지역(현재의 부산, 양산, 밀양)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반파국과 안라국에 연맹체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국명 금관가야(金官伽倻)라는 이름은 가야 시대로부터 한참 후대인 고려의 왕건이 붙인 이름이다. 금관가야에 대해 처음 사서에 전하는 이름은 구야국(狗邪國) 또는 .. 더보기
광개토왕비, 고구려사 연구와 금석문 연구의 좋은 사료가 되다. 광개토왕비, 고구려사 연구와 금석문 연구의 좋은 사료가 되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또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지안 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 중국어 간체: 太王镇)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능비이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개설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지만 고르지 않다. 대석은 3.35×2.7m 이다.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 더보기
중원고구려비,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또는 중원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는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높이는 2.03 m, 폭은 55 cm, 두께는 33 cm이고,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소재한다. 1981년 3월 1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판명됐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 더보기
전지왕, 동진, 아신왕의 맏아들, 일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다. 전지왕, 동진, 아신왕의 맏아들, 일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다. 전지왕(腆支王, 390년?~420년, 재위: 405년~420년)은 백제의 제18대 국왕이다. 휘는 영(映) 또는 전(腆) 또는 여영(餘映,余映)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직지왕(直支王),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진지왕(眞支王), 또 《한원》에 인용되는 《송서》, 《통전》에서는 부여전(夫餘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일본에 있던 중 405년 아버지인 아신왕(阿莘王)이 붕어하자 첫째 숙부 부여훈해(扶餘訓解)가 임시 섭정을 맡았으나 막내 숙부 부여설례(扶餘碟禮)가 부여훈해(扶餘訓解)을 시해하고 후임 임시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해충(解忠)이 부여설례(扶餘碟禮)를 몰아내어 주살한 후 백제에 도착한 전지왕이 16세에 보위에 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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